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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해양 세계의 역동성

샘플 아시아 해양 세계의 역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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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상세표_ 신청기간, 강사명,강사소속,교육시간으로 이루어짐
신청기간 상시모집
강사명 주경철
강사소속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교육시간 15분 41초
"바다를 통해 문명을 알아보다"


중국은 바다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고,
새로운 문명을 이끌어 가고 이슬람 문명은 바다와 육지를 넘나들며 지식과 문화를 퍼뜨렸습니다.
항해술과 선박 기술의 발달은 교역을 확장시켰고, 동서양의 문화와 경제를 이어주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중국의 해상 발전이 어떻게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는지,
이슬람이 세계 역사 속에서 어떤 교류와 변화를 주도했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그 영향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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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서양사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주경철입니다. 1편에서는 바다를 통한 항해술과 네트워크의 확산이 문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바다를 통한 인류의 발전사가 조금 새롭게 느껴지셨나요? 2편에서는 두 강에 걸쳐 각각 이슬람과 중국의 사례를 통해 아시아 지역의 해양 세계 확산에 관해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먼저 이번 강의에서는 이슬람의 항해와 교역에 관해 알아볼 예정인데요, 우선, 두 연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18년에 중국의 당 제국이 개창됩니다. 그리고 약 4년 뒤인 서력 622년에 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해 신도들과 함께 메카를 벗어나 새로운 종교를 제창했는데, 이 해가 바로 이슬람 원년입니다. 중국의 당 제국이 성립된 일과, 이슬람교가 형성되고, 이어서 광대한 이슬람권이 이루어지는 것 모두 세계사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일이지요. 더구나 이 두 거대 권역이 육상과 해상으로 소통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슬람교는 주요 종교 중 가장 빠르게, 또 광범위하게 확산했습니다. 이러한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권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와 아프리카 북부에 동서 방향으로 길게 자리 잡게 되지요. 이 광대한 권역은 내부에 아랍, 투르크,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스페인 등 여러 중요한 문명권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이 자체만으로 초 문명권, 혹은 슈퍼 문명권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더해 외부적으로 중국, 유럽, 러시아, 인도 등 주요 문명권들과 접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전 세계 주요 문명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이슬람권은 낙타를 이용한 카라반 무역 네트워크를 건설하여 교역과 교류를 활성화하였고, 이를 통해 당대 세계 주요 문명권의 물질적 혹은 정신적 성취물들을 융합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작물의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인도와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사탕수수, 벼, 레몬, 라임, 시금치, 가지 같은 것들이 이슬람권 안에 소개되어 들어옵니다. 그렇게 일단 이슬람권에 들어오면 이 내부의 교역로를 통해 먼 곳까지 전해지고 더 나아가서 이웃 문명권까지 전달되곤 했습니다. 7세기 이후 거의 천년의 기간 동안 이슬람권은 세계의 문명을 리드하고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이슬람권을 놓고 낙타를 이용한 육상 교역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슬람권은 육상뿐만 아니라 해상으로도 매우 적극적으로 팽창해 나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아랍은 매우 발전된 전통 항해술을 가지고 있어서 점차 먼 지역으로 교역망을 확대해 갔습니다. 이들은 ‘세티 범포(Settee sail)’라는, 한쪽 귀퉁이가 잘린 삼각 범포가 특징인 다우선을 운용했고, ‘카말(Kamal)’이라는, 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도구를 이용해서 별자리 항해를 했습니다. 이런 기술을 이용해서 인도양에서 일찍이 원거리 교역을 수행할 수 있었죠.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지역에 가서 짐바브웨의 금을 수입해 오는 활동이 한 예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랍과 페르시아 항해인들이 인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중국까지 항로를 개척한 일입니다. 동쪽으로 항해해 가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인도 북부의 신드 지방입니다. 이곳이 첫 관문이었고, 이곳에서 다시 동남아시아 각지로 연결해 나갔습니다.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및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는 말라카 해협인데요, 이들은 이 해협을 넘어 베트남에 도착했고, 이후 중국 남부까지 도달했습니다. 아마도 기존의 동남아시아 선원들과 선원들이 이용하던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 남부까지 들어갈 수 있었겠지요. 중국까지 가려면 당연히 소형 선박이 아니라 큰 배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큰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큰 항구가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항구는 ‘시라프(Siraf)’, 오늘날 이름으로는 ‘반다르 시라프(Bandar-e Siraf)’입니다. 이곳은 물이 깊어서 중국까지 가는 대형 선박들이 정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곳에 육상 교역로인 캐러반 루트의 주요 중개지 ‘시라즈(Shiraz)’와도 가까워서 상업 활동에 더욱 유리한 환경이었습니다. 시라프에서 떠난 배가 중국의 광저우까지 가려면 약 9천 킬로미터를 항해해야 했고 왕복으로 1년 반이 걸렸다고 하니 정말로 역사에 남을 위대한 항해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람과 해류를 이용하여 그 먼 거리를 찾아가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모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문학작품이 이런 원거리 교역 활동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지요. 「아라비안나이트」에는 새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든지, 코끼리를 잡아먹는 거대한 새를 만나든지, 괴물같이 큰 고래 등 위에서 사람이 살아가든지 하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이면에 상인, 선원, 해적 등 이슬람권 상업 세계의 주역들이 배를 타고 머나먼 이방인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 교역 활동을 하는 사정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아랍 항해인들은 해로를 개척하여 중국과의 교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9세기의 아랍 지리학자 알 아쿠비(al-Yaqubi)는 “중국과 바그다드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이 없다. 바다를 통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올 수 있다.”고 적어서 이 위업을 찬미했습니다. 과연 아랍 선박은 중국 남부까지 진출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을까요? 혹시 한반도에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을까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럴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아랍 기록에, 신라에 관한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기 815년에 술라이만이라는 상인은 “중국 해안 너머에 신라(al-Sila)”라는 섬이 있는데... 우리 동료들 중에 그곳에 갔다가 소식을 전해 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 나라에는 하얀 매가 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846년 이븐 쿠르다드비라는 사람은 ”이 나라에는 금이 많이 나며, 이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엄청나게 좋은 환경 때문에 그곳에 머물곤 한다.“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어쩌면 한반도도 이 시기에 초장거리 해상 교역로에 연결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지만, 자세한 것은 더 연구가 진척되어야 알 수 있겠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이 해외 교역을 하는데, 중국 자체의 선원과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방면으로 나간 게 아니라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그리고 동남아시아인이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당나라는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대제국이며 생활 수준이 높고 문화가 발전한 국가여서 거대한 교역 수요가 있었습니다. 그 수요를 외국 상인들이 충족시켜 주고, 중국인들은 수동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중국의 선원들이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항해해 나간 것은 다음 시대인 송대에 가서의 일입니다. 어쨌든 외국 항해인들의 도움을 통해 중국은 이제 본격적으로 아시아 해상 교역 네트워크에 들어간 것이지요. 이제 많은 외국 상인이 중국에 들어와서 자리 잡고 교역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기록은 이들을 대식(大食) 출신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타지크, 즉 압바스 왕조를 가리키니 결국, 아랍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호한 표현 뒤에는 아랍인 외에도 페르시아인, 타밀인, 동남아시아 상인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중국 기록에는 이 시대 항해에 관한 사항들이 빈번하게 보입니다. 예컨대 ‘인도 승려 한 명이 35척으로 구성된 페르시아 선단의 배를 이용해 스리랑카에서 스리위자야를 거쳐 720년에 광저우에 입항했다’든지, 727년 중국 승려의 기록에 ‘페르시아인들이 스리랑카에서 온갖 종류의 보석을 얻고 코룬, 즉 말레이시아로 가서 금을 얻은 후 광저우로 가서 비단을 얻는 사업에 능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당대에 이슬람 상인들이 국제 교역 네트워크를 이루고 대규모 사업을 벌이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연구자인 안드레 빙크라는 학자는 8세기에서 11세기 인도양을 ‘아랍-지중해’라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결국 중국 남부 지방에 이슬람 혹은 동남아시아 상인들이 많이 들어와서 거류지를 형성하였는데, 당국은 번방(蕃坊)이라고 부르는 이곳을 자치구역으로 인정하고, 외국인들 스스로 자치를 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번장(蕃長)이라고 칭하는 수장이 사람들을 통솔하는데, 집단 내 범죄에 대해서는 그들의 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신도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이슬람 사원이 필요했겠지요? 672년에 중국식 이름으로는 회성사(懷聖寺)라고 부르는 이슬람 사원을 건축 했는데, 이것은 중국 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슬람 건축입니다. 여기에는 ‘미나레트(Minaret)’라고 하는 높은 탑이 있어서 알라에 대한 기도를 인도하는 임무도 하지만, 동시에 선박들이 길을 잘 찾아오도록 유도하는 등대 역할도 담당하였습니다. 이 시대 교역의 실제 면모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는 침몰선 자료입니다. 9세기에 중국과 자바섬 사이의 해로에서 침몰한 선박을 건져 올린 벨리퉁 침몰선 유물이 대표적입니다. 바로 이 배가 이슬람권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상선인 다우선입니다. 이 배는 중국 남부 지역에서 상품을 적재한 후 동남아시아를 거쳐 아랍과 페르시아 항구로 가려다가 자바섬 인근 해역에서 침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배에서는 6천 점의 도자기를 수습하였는데, 여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압바스 왕조로 수출하는 도자기에는 기하학 문양과 쿠란 글귀가 새겨져 있고, 페르시아로 보내는 도자기에는 녹색 장식을 하였으며, 동남아시아에 보내는 도자기에는 불교의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중국 도자기 생산자들은 주문 지역의 수요에 맞춰 상품을 생산한 것입니다. 또 푸른색을 내는 코발트 안료를 페르시아에서 수입하여 도자기를 만든 후 다시 페르시아로 수출하였습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이 시기 광대한 아시아 지역에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초기 세계화의 주요 상품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중국의 도자기였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중국 당국은 외국 상인들과 교역 활동을 통제하고 관세를 부과하기 위해 시박사(市舶司)라는 관청을 설치하였습니다. 외국 상인들과 중국 상인들이 너무 무질서하게 교역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정확히 어떤 의도인지는 불명확하지만 모든 수입 상품을 바로 거래하지 않고 6개월 동안 모아놓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든 상인이 다 참여하여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유도한 것일까요? 혹은 다른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요? 다만 잘 알려진 사실은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엄청난 규모였다는 점입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인도양 세계, 더 나아가서는 이슬람권 사이의 교역이 집중해서 일어나는 곳이었으므로 실로 막대한 양의 상품이 드나드는 장소였지만, 이 시대에는 당 중앙 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기에 통제가 허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관리를 보냈으나 오히려 이 관리가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여 실로 지대한 규모의 부정부패가 발생하였던 것이지요. 상당 기간 장대하게 진행되던 아랍 상인들의 중국 교역은 당 말기에 벌어진 대혼란으로 파국을 맞습니다.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은 그 엄청난 학살 규모로 인해 악명이 높습니다. 당 말기에 연속적으로 일어난 학살극에서 외국 상인들도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879년 황소의 난 당시 광저우에서 목숨을 잃은 외국 상인의 수에 관해 어떤 기록은 10만 명을 거론하고, 또 다른 기록은 20만 명을 거론합니다. 이런 대학살을 겪은 후 외국 상인들이 중국을 떠나게 되지요. 아랍 측 기록에는 “신은 그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었다. 바다는 항해인들에게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슬람 상인들의 중국 교역은 이렇게 해서 일단락됩니다. 이후 중국에서 어느 정도 혼란이 해소되고 송 제국이 건설된 이후에는 다시 외국 상인들이 돌아오지만, 교역 방식과 구조가 이전과는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당 제국 시대에는 시라프에서 떠난 아랍 및 페르시아 선박이 9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초장거리를 항해하여 중국까지 직접 들어와서 거래하고 다시 돌아가는 방식이었지만, 송대에는 짧은 거리의 항해를 하며 교역하는 네트워크들이 각 지역에 만들어지고, 이 네트워크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아시아 해상 교역망이 구성됩니다. 그래서 예컨대 중국의 비단이나 도자기 같은 상품들이 동남아시아 네트워크에 전달되면, 이곳 상인들이 다시 인도 지역 네트워크에 전달하고, 다시 그다음 아랍 지역 네트워크에 전달하는 식으로 여러 단계에 걸쳐 상품이 이동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시아의 해상 교역은 흥망을 거듭하며 발전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죠. 자, 어떠셨나요? 이번 강의에서는 이슬람권 지역 항해인들의 수준 높은 항해술과 진취적인 교역 활동을 통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해양 세계가 확산하는 과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오늘 소개되기도 했었던 중국이 어떻게 해상 세계에서의 발전을 이루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학습목차

학습목차표_회차, 회차명, 강의시간으로 이루어짐
회차 회차명 강의시간

 학습목표

1. 이슬람의 바다
2. 중국의 해상 발전:정화의 남해 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