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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유럽의 팽창

샘플 대항해시대 유럽의 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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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상세표_ 신청기간, 강사명,강사소속,교육시간으로 이루어짐
신청기간 상시모집
강사명 주경철
강사소속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교육시간 16분 49초
"팽창하는 근대 세계 해상"


16세기 대항해시대, 유럽은 바다를 향해 새로운 세계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디뎠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이후 아메리카 대룩이 본격적으로 세계사의 흐름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세계사의 극적인 변화가 이뤄지게 됩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바다 위 근대 유럽의 해상 팽창의 과정과 아메리카 정복 여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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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서양사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주경철입니다. 1편에서는 인류가 해양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을, 그리고 2편에서는 이슬람과 중국의 해상 발전을 통해 알아본 아시아 해양 세계의 역동성에 관해 살펴봤는데요, 육지가 아닌 바닷길을 통해 인류가 영토를 확장하고 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이 굉장히 역동적으로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두 개의 강의로 이루어진 이번 3편에서는 이제 유럽으로 시선을 돌려, 중세 말부터 근대 초에 이루어진 유럽의 세계 해상 팽창 과정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지난 강의에서 우리가 살펴본 내용은 중국이 당나라와 송나라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해양 세력 확장을 위한 발전을 이루어 왔고, 급기야 명나라 초 정화의 남해 원정에 이르러서는 세계 최강의 해상 강국이라 할 정도로 성장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 스스로 해양 세계의 지배력을 버리고 자기 자신 안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곧이어 유럽이 해상 팽창의 선두에 서게 되지요. 이 시기가 장기적으로 유럽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15세기경, 중국으로 하자면 명나라 초기인데요, 유럽이 전 세계의 바다를 향해 확산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유럽이 어떻게 갑자기 바닷길을 통해 전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물론 선박과 항해술의 발전은 필수적입니다. 그런 기술적 측면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애초에 원양 항해를 시작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반대로 이런 기술적 요건이 갖추어진다고 해서 저절로 전 세계를 향한 해상 팽창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일 것입니다. 바다를 넘어 먼 대륙으로 항해해 나가는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문명적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범선을 이용해서 이웃 대륙으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서는 세계의 형상이 어떠하며, 조류와 풍향이 어떤지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상당한 규모의 선단을 지원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정치적·경제적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런 정도의 준비가 된 곳은 중국과 유럽일 텐데 앞서 말한 대로 그 당시 중국은 해상 방면의 진출을 포기하고 말하자면 자신의 세계 안에 스스로 갇힌 상황이었습니다. 중국이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버린 직후에 유럽이 세계의 바다를 향해 확산해 나간 것은 근대 세계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라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는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견해가 제시되곤 하는데요, 해양 팽창을 주장하는 환관 세력과 거기에 반대하는 관리 세력 간의 정치 투쟁, 그리고 이데올로기 갈등에서 관리들이 승리했든지, 혹은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여 해외로 나갔으나 실익이 없었으므로 포기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설명들이 그것입니다. 이런 의견도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들입니다만, 조금 더 교과서적인 설명으로는 북방의 유목민족, 특히, 이 시기에 세력이 막강해진 몽골족으로 인해 위험이 증대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북쪽의 위험이 커지는 상황에서 국가의 자원을 쏟아부어 남쪽 해상으로 팽창해 나갔다가는 자칫 멸망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해양 방면의 진출을 포기하고 북쪽 대륙 방면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럼 이제 다시 유럽의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중세 말 유럽이 세계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고, 아시아로 항해해 가는 길을 얼마만큼 예측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 중 하나가 프라 마우로(Fra Mauro) 지도입니다. 1450년경 베네치아의 지도제작자 프라 마우로가 제작한 이 지도는 그 당시까지 만들어진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세계의 모습이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져 있고, 약 3천 개에 달하는 캡션 내용을 분석해 보았을 때 세계 각지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대량으로 수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아프리카 남쪽을 돌아 인도양으로 항해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짚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지도는 단순히 세계의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잘 표현한 점이 중요하다기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절실히 원했던 바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바닷길을 통해 유럽에서 아시아로 갈 수 있으며, 아시아에 가면 유럽인들이 원하는 값비싼 향신료들과 보석이 가득하다는 내용이지요. 이 지도는 이후 유럽인들이 실제로 항해해 간 궤적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유럽의 세계 팽창을 비교적 잘 예측한 셈입니다. 그러면 유럽의 항해인들이 유럽 바깥으로 나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요? 이들이 대서양으로 나가서 처음 도착한 곳은 아조레스, 카나리아, 마레이라 같은 섬들입니다. 대서양상의 이 제도들은 사실 고대에 알려져 있다가 잊혔거나 전설로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14세기에 유럽 선원들이 차례로 이 섬들을 재발견했고, 15세기가 되었을 무렵 정복을 완료했습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아마도 고대에 아프리카 북부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고립되어 문화 수준이 정체 혹은 후퇴했다가 유럽인들의 등장으로 인해 결국 멸종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현상은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일대 파괴의 전조 현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 여파가 어느 정도였는지 카나리아 제도의 경우를 살펴보면, 15세기 초에 스페인 원정대가 이 섬에 등장한 이후 카나리아 제도의 관체족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의 삶이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습니다. 이들은 유럽 침략자들의 말과 총기 앞에 혼비백산하며 제대로 반격하지도 못한 채 패배했고, 정신적으로도 무력화되었으며, 특히 유럽인들이 들여온 병원균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당했습니다. 곧바로 섬들은 사탕수수 재배지로 변모했고, 소수의 생존자는 노예처럼 혹사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바닷길을 통한 유럽 항해인들의 침략은 당시 수많은 원주민의 영토를 빼앗고,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지요.이 당시 해외 팽창의 선두에 선 두 개의 유럽 국가가 있었는데요, 바로,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입니다. 아메리카에 진출한 스페인은 다음 강의에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이번 시간에는 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 서쪽의 변방이며 인구와 영토 모두 아주 작은 소국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의 브라질, 아프리카 대륙의 앙골라, 모잠비크,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인도와 마카오 등 3대륙에 걸친 엄청난 식민지를 건설한 것은 흔히 기적 같은 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히크의 영웅적 풍모를 자주 거론하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그런 식의 설명보다는 구조적 요인들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의 특성을 말하자면, ‘경계성’을 들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게 말해 볼 수 있겠는데요. 우선은 기독교권과 이슬람권 사이의 경계성입니다. 포르투갈에는 일찍이 이슬람 세력이 들어왔다가 퇴각한 적이 있고, 위치상으로도 여전히 아프리카의 이슬람권 국가들과 마주하고 있어서, 종교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의 문화적·경제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음으로는 대서양과 지중해 세계 사이의 경계성입니다. 이탈리아의 발전된 경제 기술과 자본, 그리고 인력이 포르투갈의 해양 발전에 큰 기여를 했는데, 이것이 바탕이 되어 대서양으로 팽창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포르투갈은 선진 지중해 경제의 영향을 받아 발전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권과 경쟁하며 자극을 받아 팽창한 것입니다. 또한 포르투갈은 한편으로는 종교·군사적 공격을 시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역을 확대해 나가는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먼저 종교·군사·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측면을 볼 때, 왕족과 귀족 중심의 인물들은 기독교의 원수인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기 위하여 세우타, 탕헤르 같은 중요 거점들을 공격했습니다. 비록 이로 인한 성과는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국왕의 동생이 사로잡혀 옥사하고, 심지어 종교적 광신에 휩싸인 국왕 세바스티앙이 아프리카 북부의 전투에 직접 참전했다가 전사하는 일도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해 내려가며 교역을 넓혀간 측면은 장기적으로 포르투갈의 해양 세력을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해안 지역에서 금, 노예, 향신료, 상아 같은 아프리카 지역의 상품을 교역하며 조금씩 남하하는 와중에, 점차 자신의 해양 팽창 능력에 자신감을 얻어 결국은 아시아 항해로까지 목표를 상향 조정했던 것이지요.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를 넘어 아시아까지 항해해 간 여정에 대해서는 그 과정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데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는 아프리카 최남단을 넘어 인도양으로 처음 들어간 항해인입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최남단 폭풍우 치는 바다 위의 봉우리를 보고 ‘폭풍우의 곶’이라고 명명했는데, 훗날 그가 귀환하여 국왕에게 보고했을 때 국왕은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희망봉’이라 다시 명명했습니다. 자, 이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가서 인도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당시의 국왕 마누엘 1세는 1497년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에게 인도를 항해하라고 지시했고,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인도 캘리컷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이 첫 항해는 인도의 현지 지배자와 갈등을 겪으면서 큰 소득 없이 심대한 곤경을 겪은 채 끝났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중세 내내 전설로만 여겨졌던 인도로 직접 가는 항로를 최종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입니다. 조만간 포르투갈은 아시아 해양 세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죠.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바로 ‘폭력의 집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시아의 해양 세계는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중국이나 인도에는 강력한 제국이 자리 잡고 있고, 해양 세계에도 장구한 세월 동안 교역을 수행한 강력한 항구 도시 국가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곳에 배 몇 척을 가지고 들어온다고 해서 곧바로 해상 패권을 잡을 수는 없겠지요. 물론 유럽의 선박과 포가 아시아의 그것보다 강했지만, 그렇다고 포르투갈이 이 광대한 해역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필수적인 항구 혹은 해로들을 확고하게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전략을 구사해야 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인도 진출 과정이 어떠했는지 한 번 살펴볼까요? 먼저 포르투갈이 인도양에 들어와서 충돌한 최강의 세력은 오스만투르크입니다. 이미 지중해에서 직면하고 있는 유럽 세력이 반대편 해역으로 들어와 침탈하려는 데 대해 오스만 제국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80대에 이른 노 제독 피리 레이스(Piri Reis)가 지휘하는 오스만 해군이 주요 지점들을 놓고 열아홉 차례에 걸쳐 포르투갈과 전투를 벌입니다. 여기서 포르투갈이 승기를 잡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포르투갈이 완벽한 승전을 거둔 것은 아니었고, 또한 아시아의 바다를 완전히 통제한 것 역시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해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도 아시아 해역 전체를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아니었고, 또 수많은 아시아 상인들을 통제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교역을 수행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시아의 해양 세계에서 포르투갈이 한 일은 주요 지점들을 차례로 지배하고 그곳에 무역 활동을 위한 상관(商館)들을 건설한 것입니다. 1571년경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은 소팔라와 나가사키 사이에 40여 개의 상관들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렇게 요충지들을 장악하고 그곳들을 중심으로 선박들이 오가며 교역 활동을 한 것입니다. 어느 지점에서는 후추와 향신료를, 어느 지점에서는 면을, 또 어떤 지점에서는 은을 얻는 식이며, 그래서 선박들이 이 지점들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한 곳의 상품을 확보한 다음, 다음 장소에서 파는 식의 교역 활동을 진행해 나갑니다. 이런 식의 해로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을 두고 역사가들은 상업 거점 제국(Trading-post Empire)이라고 부릅니다. 땅을 지배하는 일반 제국과 달리 해상 거점들을 통제하고 그곳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교역과 교류를 지배한다는 개념입니다. 포르투갈이 아시아의 육상 혹은 해상을 모두 지배한 것도 아니고, 아시아의 해상 교역을 전적으로 통제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현지 지배자나 상인들의 협력을 얻는다던가 혹은 더 정확히 표현하면 협력을 강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존 아시아 교역 체제 속에 일종의 스며들어 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아시아 교역에 참여하면서 이익을 수취한 것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지요. 그 과정에서 종교와 문화적인 교류도 일어났기 때문에 때로는 아시아 일부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유럽 세계 해상 팽창의 선두에 섰던 두 나라 중 포르투갈의 해양 세계 진출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상업 거점 제국을 만들어 교역을 통해 아시아에 진출했던 포르투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다음 시간에는 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이 어떤 모습으로 해양 세계에 진출했는지 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학습목차

학습목차표_회차, 회차명, 강의시간으로 이루어짐
회차 회차명 강의시간

 학습목표

1. 해상 팽창의 선두에 선 유럽
2.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