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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네트워크의 발전과 해양의 미래

샘플 해양 네트워크의 발전과 해양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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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상세표_ 신청기간, 강사명,강사소속,교육시간으로 이루어짐
신청기간 상시모집
강사명 주경철
강사소속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교육시간 13분 45초
"역사를 통해 바라보는 미래의 바다"


19세기 이후, 기술의 발전으로 세계 해운의 혁신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리기도 했지만, 제국주의 세력들의 인도, 중국, 일본을 압박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바다의 새로운 이점이 대두되면서 제해권 다툼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19세기 이후의 세계사를 통해 근, 현대 해양 세계사를 알아보고,
긴밀해진 바다와 인간의 관계를 확인하여 우리가 미래의 바다를 어떻게 조성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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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서양사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주경철입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19세기 이후 바다를 통해 세계가 더욱 긴밀하게 소통하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여러분, 여름이 되면 주로 어디로 피서를 가시나요? 무더운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로 휴식을 취하러 떠나곤 하는데요, 오늘날 바다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고 낭만적인 장소로 생각하는 공간이지요. 하지만 먼 과거의 사람들에게 바다는 결코, 친숙하거나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밤에 바닷가에 나갔다가 유령선을 보면 곧 죽는다는 식의 전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의 사람들에게 바다는 무섭고 흉흉한 장소였습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바다는 자유가 발휘되고 영혼의 내면을 고찰하는 숭고한 공간으로 고양되고는 했지요. 그렇지만 그때도 바다는 아무에게나 열린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과학기술의 힘을 갖춘 서구 세력만이 바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제국주의 이념이 팽배했던 것이지요.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바다에 대한 지식과 정보도 점차 쌓여갔습니다. 예컨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며 다양한 방면에서 다재다능했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항해하는 배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항해하는 배보다 항해 시간이 2주나 더 걸리는 원인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는데요, 그래서 당시 고래잡이 선을 운영하고 있었던 사촌 티모시 폴저와 함께 대서양 해류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고, 3노트의 강한 해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강한 해류를 거슬러 가는 배보다 해류를 타고 가는 배가 훨씬 더 빨리 항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멕시코 만류를 발견한 거지요. 그리고 이 해류의 방향, 폭, 강도를 표시한 그의 지도는 이 시대 항해에 아주 유용한 정보가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에는 증기선이 곧바로 시대의 주역이 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 이전에 지난 시대의 주역인 범선도 최고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클리퍼라고 불리는 범선은 가로돛 20개를 달아 미풍만 불어도 빠른 속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이용해 중국이나 인도의 차와 아편, 오스트레일리아의 양모와 같은 물품을 수송하고, 나중에는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일도 했지요. 이에 따라 세계는 더욱 빠르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범선은 곧 한계를 드러냈고, 증기선이 대세로 떠오르게 됩니다. 배에 증기기관을 달아 그 힘으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는 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는데요, 물론 그 개발 과정이 쉽지는 않았죠. 이 증기선은 미국의 강에서부터 이용되기 시작했는데요, 미국의 공학자 로버트 풀턴이 제작한 노스 리버 스팀보트는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욕에서 올버니 지역까지 4일 거리였던 것을 32시간으로, 올버니에서 버펄로 지역까지 32일 걸리던 거리를 6일로 단축했습니다. 당시에는 정말로 혁신적인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 곧바로 증기선이 강에서 바다로 진출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만큼 쉽게 발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바다에서 증기선으로 항해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는데요, 엄청난 양의 석탄을 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석탄을 때야 했기 때문에, 승객이나 화물을 실을 공간은 거의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익성 측면에서는 좋지 않은 모델이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증기선 항해 사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의외의 요소가 작용했습니다. 그 무렵, 영국 당국은 이른 시일 안에 규칙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아야 하는 필요성으로 인해 우편선 노선을 개설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 비용을 보조하기로 합니다. 영국은 우선 인도까지 가는 정기 노선 개설을 지원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영국에서 출발한 배가 지중해를 항해하여 이집트까지 간 다음, 수에즈 지역에서는 낙타를 이용해 사람과 화물을 홍해로 보내고, 다시 홍해에서 선박을 이용해 인도까지 가는 식이었습니다. 그 후 이 노선이 연장되어 봄베이, 홍콩, 상하이, 나가사키까지 가는 노선이 추가로 개설되었고, 당시 조선이었던 우리나라도 연결되었지요. 이런 장거리 노선을 항해하려면 석탄을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중간 지점들에 석탄을 쌓아두었다가 배에 제공하는 석탄 보급소 즉, 저탄소들을 설치했습니다. 세계 각지에 이런 저탄소를 설비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영국만이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 세계의 해운은 자연스레 영국이 지배하다시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실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원거리 항해 노선을 운영하는데 증기선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범선이 함께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대서양을 넘나드는 우편선은 석탄을 보급받는 일이 쉽지 않아 증기선 운용이 사실상 힘들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범선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아무래도 범선은 속력을 통제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규칙적인 노선 운영이 쉽지는 않았지요. 예를 들어, 당시 해운 회사인 블랙볼 라인(Black Ball Line)사는 같은 속도의 우편선을 매달 같은 날에 출항하는 방식으로 도착 시간을 최대한 맞추려고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이 방법 역시 한계에 부딪혔고, 결국 증기선을 투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큐너드 사(Cu-nard)가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정기 우편선 노선에 증기선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대서양을 넘어갈 순 있게 되었지만 앞서 초기에는 선박의 공간 대부분에 석탄을 채워야 한다고 말씀드렸었지요? 영국-캐나다-미국을 연결하는 노선의 경우 하루 석탄 소비량이 무려 38톤에 달했고, 이런 이유로 승객을 많이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승객에게는 ’고가의 운임을 받고, 최고급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전략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컨대 선상에서 젖소를 키워 신선한 우유를 직접 제공하는 식이었지요. 그 후 경쟁사인 콜린스 라인(The Collins Line)이 뉴욕과 리버풀을 연결하게 되었고, 큐너드와 콜린스 라인, 이 두 회사의 경쟁으로 인해 나중에는 운임이 낮아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주요 국가들 사이에서는 거대하고 빠른 선박을 건조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희대의 천재 엔지니어 브루넬이 이 시기에 엄청난 거선들을 제작합니다. 예컨대 ‘그레이트 브리튼 호’는 철제 선박이자 최초로 추진 방식에 있어 스크루를 사용한 선박인데, 길이 96.6미터, 폭 15.5미터, 높이 15.3미터로써 실로 전례 없는 규모의 거대한 선박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철로 만든 선박이 과연 물에 뜨는지 의아해하던 시절이었는데요, 이 배는 한 번 좌초하기도 했지만, 철제 선이라 수리하여 재사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 철제 선박의 안전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향후 이 배는 오스트레일리아 항로에 투입되었고, 크림 전쟁과 인도의 세포이 반란 당시에는 군사용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브루넬의 마지막 작품은 그레이트 이스턴호인데요, 이 배는 길이가 207미터이니 당시로서는 정말로 상상하기 힘든 거선이었는데, 브루넬은 이 배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어쩌면 시대를 너무 앞서간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또한 그레이트 이스턴호는 불행하게도 당시 개통한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보다도 폭이 커서 이 운하를 이용하지 못해 먼바다를 돌아가야 했고, 배가 너무 크다 보니 승객을 모으기가 어려워 결국에는 파산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해운은 여러 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게 되는데, 우선 앞서 잠시 언급한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본래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는 아프리카를 돌아 먼 거리를 항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에서 홍해를 거쳐 바로 인도양으로 빠져나가다 보니 그야말로 최단 거리의 항로가 만들어집니다. 프랑스의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Marie de Lesseps)라는 사업가가 이집트 정부와 협약을 맺은 후 2억 프랑의 자금을 투입하여 무려 12만 명이 사망할 정도의 힘든 공사를 11년 동안 진행한 끝에 162.5 킬로미터의 운하를 완공하였습니다. 희망봉을 돌아가는 경우 3개월 걸리던 항해 시간을 3주로 줄여 세계 해운의 혁신을 가져온 것이죠. 프랑스로서는 이 운하의 개통으로 큰 이익을 거두리라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영국이 최대 수혜자가 되었고, 급기야는 영국이 이집트의 재정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운하 회사의 지분을 매수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운하를 지배하기에 이릅니다. 이집트는 1956년에 가서야 운하를 국유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엔진의 발전이 더해집니다. 증기선은 엄청난 양의 석탄을 소비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엔진 개발이 급선무였는데요, 증기를 단계적으로 활용해 연료 효율을 높인 고압 복식 엔진이 나오자 이제 영국에서 남아프리카 모리셔스까지 한 번에 갈 수 있게 되었고, 이곳에서 석탄을 보충한 다음 중국까지 갈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터빈 엔진이 개발되어 효율성은 더욱 개선되었습니다. 이렇게 엔진이 크게 개선되고 운하가 완공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킨 큰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형 해운회사들이 세워지고 서로 경쟁하게 됩니다. 20세기 초 세계 최대 해운 회사인 HAPAG(Hamburg America Line)는 1900년에 95척의 선박을 소유했고, 1914년에는 선박 수가 무려 2배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계는 더욱 가깝게 연결되었습니다. 이처럼 세계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인프라는 바로 해저 케이블 입니다. 교통과 함께 통신 역시 발전해야 할 테니까요. 사실 이 케이블 자체는 1830년대에 등장하여 지상에서는 이미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럽과 미국, 유럽과 아시아처럼 대륙 간 소통을 하려면 케이블을 해저에 매설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물속에서 누전 없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절연 물질을 구하는 게 핵심 과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열대 수목의 수지를 말린 구타페르차(gutta-percha)라는 물질로 해결했는데요, 이 구타페르차를 이용하여 만든 케이블을 해저에 설치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1866년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대륙 간 전선이 얼마나 유용한지 알려주는 초기 사례에 대해서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영국은 캐나다 주둔군에게 인도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반란 문제가 해결되어 군 이동이 불필요하게 되었지요. 마침, 대서양을 횡단하는 해저 전선이 완공되었기에 곧바로 군대 이동 중지 명령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많은 인력이 캐나다에서 배를 타고 몇 달이나 걸려 인도로 간 다음 그곳에서 허탕 치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아와야 했을 겁니다. 이렇게 수송과 통신 혁명을 통해 세상은 갈수록 더 긴밀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이런 발전이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한 것은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그렇다고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다음 강의에서는 바다를 통한 발전이 제국주의를 어떻게 강화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학습목차

학습목차표_회차, 회차명, 강의시간으로 이루어짐
회차 회차명 강의시간

 학습목표

1. 19세기 세계화의 진행
2. 제국주의의 바다
3. 희망의 바다, 공포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