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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문화와 교류의 무대로써의 바다의 역할

샘플 고려시대, 문화와 교류의 무대로써의 바다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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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상세표_ 신청기간, 강사명,강사소속,교육시간으로 이루어짐
신청기간 상시모집
강사명 이익주
강사소속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교육시간 9분 54초
우리 조상들은 바다를 어떻게 활용했을까요? 
다양한 항로를 통해 활발한 해상활동을 했다는 사실! 믿어지시나요?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항해술에 익숙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통일신라 때 활발했던 해상교류는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며 
우리나라의 이름이 처음으로 서양에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이웃나라 중국과 긴밀히 왕래하며
종교, 사상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유입했습니다.
고려시대 사회와 학문 분야의 성장을 가져온
고려의 ‘바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고려의 바다에 대해 함께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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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이야기] 안녕하세요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의 이익주입니다 우리는 3년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입니다[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 지금도 그렇고 고려시대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다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교통로가 됩니다[우리에게 중요한 이동 통로인 바다] 바다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문화가 수용이 되었고 누가 바다를 통해서 중국을 왕래했으 또 고려는 자기 바다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먼저 바다를 통한 문화교류에 대해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고려의 바다-바다를 통한 문화교류][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장 한국역사연구회 편집위원장][고려의 바다 바다를 통한 문화교류] [고려 건국 당시 멸망한 당나라]고려가 건국되었을 때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 10국기라는 혼란기가 당분간 이어집니다 [960년 송나라 건국과 함께 정리된 5대 10국 혼란기] 960년에 송이 건국되어서 혼란기를 정리하지만 그 사이에 그 북쪽에서 거란이 나라를 세웁니다 그 결과 북쪽에 거란과 남쪽의 송이 서로 대치하는 모습이 연출이 되는데요 그 두 나라 가운데 거라는 군사적으로 강력한 군사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송은 군사력은 약했지만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훨씬 더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친송, 반거란 정책을 유지한 고려]고려는 친송 반거란 정책을 처음부터 결정하고 그런 정책을 당분간 유지합니다 송으로부터 선진문화를 수용하고 또 경제 교류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송나라로부터 얻을 이익에 중점을 둔 고려] 특히 우리 역사에서 고려 초기가 갖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발달한 선진문화가 우리나라로 수용이 되어서 우리 식으로 발전하는시기 이것이 바로 고려 초기입니다 자 이렇게 문화수용을 위해서 고려는 송까지 왕래하는 교통로 백기를 개척할 필요가 있었습니다[문화수용을 위해 필요한던 바닷길 개척] 크게 보아서 고려해서 송을 왕래하는 뱃길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북쪽으로 하나 남쪽으로 하나가 있었는데요 북쪽으로 가는 길을 북선항로라고 합니다 예성강을 출발해서 곧장 중국의 산동반도로 가는 길입니다 고려 초에는 이 길을 주로 사용을 했습니다만 그 뒤에 거란이 북쪽을 차지하게 되고 이어서 금이 그 북쪽을 차지하게 되면서이 항로를 꺼리게 됩니다[거란, 금이 연이어 북쪽을 점령하자 항로 사용이 어려워진 고려] 그래서 북쪽에 거란과 금을 피해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개척하게 되는데 남쪽 길을 남선항로라고 합니다 개경 앞에 있는 예성각을 따라서 배가 서해안을 쭉 내려갑니다 그래서 지금 전라남도 끝에 있는 흑산도까지 내려갑니다 거기서 서해바다를 건너서 중국 강남 지방에 명주로 도착하는 길입니다 북선향로보다는 시일이 많이 소요되서 21일 정도가 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 길을 이용해서 중국 사신이 고려해 오기도 했습니다 이 길을 통해서 가장 많이 왕래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상인들이었습니다 상인들은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으니까요 특히 고려상인이 송해가는 것보다 송나라 상인이 고려해 오는 일이 많았는데요 매년 상선 수척이 왔고 상인 수백 명이 한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고려 초기에 송으로부터 문화를 수용한다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제도 그리고 도자기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고려청자는 송의 청자 제조 기술을 받아들여서 우리 식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송의 청자 제조 기술을 우리식으로 발전시킨 고려] 청자라고 하는 것은 점토로 그릇을 빚은 다음에 유약을 발라서 1200도씨 이상에서 구운 그릇을 말합니다 세계에서 처음 받는 나라는 중국이었습니다[청자를 최초로 만든 중국] 그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청자를 만든 나라가 바로 우리 고려였습니다[세계에서 두 번째로 청자를 만든 우리나라] 자이 청자가 고려 초에 중국에서 들어와 고려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나라 대표]비색청자, 상감청자 이렇게 중국에는 없는 우리의 독자적인 청자로 발달을 하게 되는 것이죠 단순한 카피가 아니라 수용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낸다라고 하는이 점도 중요하게 기억할 대목입니다 송나라의 태평노인이 쓴 수중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수중금에서 언급한 천하제일물건]이 책에는 천하제일 좋은 물건들을 쭉 나열을 한게 있는데 그 가운데 고려비색이라고 하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청자의 원조 중국도 인정한ㄴ 고려청자] 고려의 비색 청자는 중국 사람들이 볼 때에도 천하제일의 청자였다라고 인정을 한 것이죠 자 여러분이 알고 있는 고려의 정치제도 3성6부라고 하죠[3성 6부 당나라에 완성된 관료제도로 고등행정을 담당하는 3성과 국무를 분장하는 6부로 되어있다.] 이 제도는 중국에서 당나라 때 완성된 정치제도입니다 모든 국가의 사물을 6개로 나누고 6부을 두어서 각각 관리하게 하는 이런 정치제도가 태봉과 신라까지는 수입되지를 못했습니다 고려가 건국되었을 때 신라를 통합해서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지만 태봉과 신라의 제도들이 한마디로 비루하다 다시 얘기해서 너무 발달하지 못한 상태이다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정치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서 중국으로부터 중국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이죠 당나라에서 완성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인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당나라의 제도를 적극 수용한 고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당시 송으로부터 여러 가지 문화 특히 서적 책이죠 책을 통해서이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정치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했던 서적] 그와 함께 이런 각종 제도들의 정신적인 기반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유교 정치 이념이죠 정치를 하는데 유교를 가지고 한다 이런 생각은 신라 말에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유학자들에 의해서 알려졌는데 이 사실을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하고 현실에 적용한 것은 고려 초기에 일입니다[유교 정치 이념을 적용한 고려 초기] 특히 고려의 성종 때 중국의 여러 가지 제도와 함께 유교 정치 이념이 받아들여지게 되는데요 우리가 알고 있는 최승로의 심의 28조가 바로 그 유교 정치 이념 기반한 여러 가지 시책을 왕에게 건의하는 이런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시무 298조 고려 전기 문신 최승로가 성종에게 당면한 과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정책서] 자 이래서 적극적으로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는데 놀랍게도 그 당시 고려 사람들은이 문화수용의 원칙을 하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시 최승모의 시무 28조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자 한번 읽어보죠 중국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지만 천하의 습속은 각 그 지역의 특성을 따르는 것이므로 바꾸기 어렵습니다 예약이나 시서의 가르침 군신 부자의 도리 이것이 유교 정치이념이죠 이것은 마땅히 중국을 모범으로 삼아서 비루한 습속을 개혁하지만 그 나머지 수레 타는 것 말 타는 것 옷 입는 것 이런 제도와 토착 풍속은 때에 따라서 사치와 검약을 적절하게 해서 중국과 꼭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합니다[조상들이 지키고자 한 민족 고유의 정신] 자 우리 것을 지키고 필요한 것을 받아들여서 우리 식으로 소화한다고 하는 원칙을 이야기하는 거죠 [문화를 수용하는 통로혔던 바다] 이 문화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바로 바다가 되었던 것입니다 [13세기 몽골제국 등장으로 쇠퇴한 바닷길]이렇게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바다를 통한 교류는 13세기에 몽골제국이 들어서면서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몽골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했습니다만 그 비결 역참[말을 타고 가서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접하는 일과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는 일을 위해 마련된 고통통신기관]이라고 하는 제도를 이용해서 육로에서 아주 효율적인 교통로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몽골의 육상교통론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효율적이었는데요 육상교통로가 발달하면서 상대적으로 바다를 통한 교통은 쇠퇴하게 되었던 것이죠 고려도 13세기 몽골제국이 들어선 다음에는 주된 교역에 대상이 중국의 남쪽 지방이 아니라 베이징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북쪽 지방이 되고 주로 육로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 결과 고려 전기에 활성화 되었던 바다를 통한 교류는 고려 후기에 쇠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마찬가지였고 이후 조선시대에도 고려 전기의 활발한 바다 교통은 재개되지를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잊은 역사가 있죠 바다를 통해서 외부 세계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바로 이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개방성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바다를 통한 개방성과 문화의 다양성을 지금 되살릴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고려는 이렇게 바다를 통해서 외부의 개방되어 있었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문화로 소화해서 독자적인 고려문화를 발달시켰습니다 자 이런 과정에서 고려의 바다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죠 다음 시간에는 이 바다를 통해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왕래를 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에 이익주였습니다ㅈ

 학습목차

학습목차표_회차, 회차명, 강의시간으로 이루어짐
회차 회차명 강의시간

 학습목표

제1강 <고려 바다를 통한 문화교류>
제2강 <고려 바다를 통한 인적교류>
제3강 <바닷길을 통한 고려시대의 물자이동>